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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에서 방영한 창씨개명때의 작명법

작성자
한글이룸
작성일
2018-10-16 15:19
조회
478
대구 MBC는
2010년 10월 22일 경술국치 백 돌 HD 특별기획
"우리 이름 가는 길을 묻다"를 방송했습니다.
아직도 일본식 작명법에 사료잡혀 있는
우리의 자화상...!!
우리가 주로 쓰고 있는 한자의 획수에 의한 수리성명학이 일본식 작명법임을 발굴,
우리 이름의 정체성을 묻는 프로그램이다.
수리성명학은 일제강점기에
현 일본의 종교법인 오성각의 창시자
쿠마사키 겐오가 만든 작명법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프로그램은 한글 이름이 한자 이름보다
더 기억하기 쉬운 좋은 이름이라는 사실을
서울대학교 병원 뇌자도(MEG)센터와
함께 과학적으로 규명했다.


[글쓴이] 대구MBC 백운국 프로듀서


사람들은 누구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은 평생을 통해 다른 이에 의해 불려진다.


이름은 단순히 몇 음절의 단어가 아니라 나의 또 다른 나요 한 개인의 또 다른 영혼인 것이다.


그래서 이름은 ‘나’ 인 동시에 특정 민족에 있어서


그 총합은 타 민족과의 차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정체성이 된다.


그런데 개인의 영혼이요 동시에 민족의 영혼인 우리 이름은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통해


그 정체성이 송두리째 훼손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원형을 회복한 것으로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영자', '순자'와 같이 '자'로 끝나는 일본식 이름이 거의 자취를 감춘 요즘에는,


우리 주위에 일본식 이름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이름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성명학의 대가 쿠마사키 겐오라는 한 일본인 작명가의 수리성명학에


그 철학적 기초를 두어 수많은 우리 아이의 이름들이 아직도 일본식으로 지어지고 있다.


한자의 획수로 이름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이 작명법은 일본에서는 쿠마사키 겐오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도 일본의 신생아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이 수리성명학은 놀랍게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작명가들도 아직 사용하고 있다.


이 수리성명학은 한자 이름의 획수를 81획까지 정해 놓는데 그 반 정도가 나쁜 획수다.


그래서 웬만한 이름도 좋지 않은 이름으로 판단해 개명을 권유받는다.


우리 이름의 성 앞에 일명 가성의 새로운 성을 만들어 일본인처럼 네 자의 이름으로 작명하는 방법이다.


세 자의 이름이 대부분인 우리 민족에게는 기본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작명법인 것이다.



'백운국'이라는 이름을 예로 들자면 '백'이라는 성 앞에 한 획의 가성을 추가,


천격을 제외, 인격 지격 외격 총격의 수리사격으로 길흉화복을 따진다.


그래서 웬만한 이름이면 최소한 한 격 이상은 흉수가 나오고


작명가들에게는 이것이 무기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저 좋은 뜻의 이름만 지어주기보다는


마치 특별한 법칙을 적용해 이름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길수로만 이름을 짓자면 작명가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명법이 창씨개명 당시 일본인 작명가들에 의해 유포되었으며


아직도 그럴듯한 동양철학으로 위장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성명학이라면 돈벌이나 하는 강단 밖의 저급한 동양철학 정도로 치부,


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학계와 대중의 무관심 속에


수리성명학은 아직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수많은 작명 책에는


한자의 획수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정하고 아이들의 이름에 이를 적용시키는 작명법을


거의 빠짐없이 볼 수 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작명법이 창씨개명 때 이 땅에 퍼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말 수리성명학은 창씨개명 때 널리 사용되고 퍼진 것일까?



우리는 그 실마리를 일제강점기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1940년 3월 16일의


한 광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창씨개명이 실시되고 한 달이 조금 지난 그때,


쿠마사키 겐오의 수리성명학 작명 광고를 찾아 낸 것이다.


창씨개명은 우리 민족의 이름을


반년 만에 80퍼센트나 바꿔 놓은 인류사 유례 없는 민족말살 정책이었다.


200여 개의 성(性)을 중심으로 친족으로 강하게 묶여 있던 조선과는 달리


일본은 약 30만 개의 씨(氏)로 친족이라는 장애물 없이


각 가족과 천황이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로 곧바로 이어진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통해 우리의 친족 중심의 가족제도 대신 천황 중심의 가족제도를


이 땅에 심어 황국신민화 정책을 완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식민지 민족의 이름 대부분을 일시에 바꾸는 세계사


유례 없는 폭거는 식민 본국의 작명가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때 일확천금의 대열에 끼어든 작명가가 바로 쿠마사키 겐오였던 것이다.


국내 최초로 대구문화방송 특집 취재팀은 일본 현지에서


쿠마사키 겐오라는 인물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는 도쿄 진보쵸 고서점가에서 쿠마사키 겐오의 역작,


성명의 신비라는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31년 간이나 출판되고 있으며 70여 회 재판된


이 책은 일본 성명학 책으로는


장기간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이 책에 적힌 주소를 기반으로 하여


취재팀은 쿠마사키 겐오의 작명소를 도쿄의 오타구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작명소는 도쿄의 상류층을 대상으로 종교법인 오성각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지만


1881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손자 며느리인 쿠마사키 카즈사가 가업을 잇고 있었다.


카즈사는 쿠마사키 겐오의 수리성명학이 아직도 한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매우 신기해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는 듯도 했다.


그에 의하면 쿠마사키 겐오의 수리성명학은


이곳에서 작명을 배우고 다시 돌아간 조선인 문하생들에 의해 퍼졌다고 한다.


그런데 국내의 일부 작명가는 쿠마사키 겐오의 수리성명학이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전파되었다가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일본식 성명학으로 봐서는 안되며,


동양철학으로 봐야 한다는 강변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구MBC의 취재로 수리성명학은 쿠마사키 문하생들에 의해


직접 우리나라로 유입된 것이 밝혀졌다.


이미 1941년 창씨개명이 실시되기 몇 해 전부터


경성 즉 서울에는 쿠마사키 겐오의 문하생들로 이루어진 별도의 조직이 있어


수리성명학이 체계적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원숭이라 불릴 정도로 작고 못생긴 외모를 가졌지만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큰 출세를 하게 된다.


오사카의 토요쿠니 신사에서는 그가 출세의 신으로


모셔져 있는데 그의 이름 총획이 32수라고 하는데


수리성명학에서는 매우 좋은 획수로 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도쿠카와 막부를 연


도쿠카와 이에야스 역시 길수라는 것이다.


이 후 일본 역사를 통해 단명한 쇼군들은 흉수로


그리고 특별히 불행한 삶을 살지 않은 쇼군들은 길수로


일본 근세 메이지 시대에 정립된 작명법이 수리성명학이라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수리성명학은


우리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창씨개명 때 이용된 일본의 전통적인 작명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명법이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있었을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


큰 공을 세운 일본인 장수 사야까.


그에게 선조는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후 ‘이괄의난’과 ‘병자호란’에도


공을 세워 삼란공신이 된 그는 자헌대부라는 벼슬과 함께 7,000여 명의 후손을


이 땅에 남기며 72세의 일기로 훌륭히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수리성명학으로는 흉수이다.



조선시대에도 수리성명학이 존재했다면


임금이 직접 하사한 이름에 최소한 흉수는 피해 나가지 않았을까?


이밖에도 수리성명학으로는 매우 안 좋은 획수지만


결코 불운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없는


수많은 인물도 있다.



반대로 매우 좋은 획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이라고 볼 수 없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대구 MBC 경술국치 백 돌 HD 특별기획 "우리 이름 가는 길을 묻다" 에서 발췌

영상 자료

찾아오시는 길